제주에서의 추석은 늘 조용합니다.
귀향을 포기한 지 몇 년째, 비행기표를 구하는 고생과 지출을 생각하면 일찌감치 마음을 접게 되죠.
덕분에 북적이는 명절 대신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사람 입이 둘뿐이라 굳이 명절 음식을 차리지도 않았는데, 올해는 아내가 "추석 기분이라도 내야겠다"며 모듬전을 만들자고
하더군요. 그 말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추억을 부르는 고소한 기름 냄새
아침 일찍부터 주방에서는 명절 특유의 고소한 기름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동태전을 필두로, 쫄깃한 오징어튀김, 속이 꽉 찬 동그랑땡, 그리고 은은한 단맛의 애호박전과
향긋한 새송이버섯전까지, 다섯 가지 전을 준비하는 아내의 손길이 분주했습니다.
저는 옆에서 재료 준비를 돕고, 설거지 담당을 맡았죠. 아내가 전을 한 가지씩 부쳐낼 때마다 그 옆에서 갓 나온 따끈한 전을 집어
간을 보는 것은 제 몫이었습니다.
겉은 노릇하게, 속은 촉촉하게 잘 익었는지 확인하는 중요한 임무였는데, 솔직히는 그저 뜨거울 때 먹는 전의 맛을 포기할 수
없어서였어요.
그렇게 꼬박 세 시간을 열심히 전을 부쳤습니다. 식탁 위에는 황금빛으로 물든 다채로운 전들이 탐스럽게 쌓였고,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어릴 적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의 전과 어린 날의 추억
어린 시절, 추석 준비로 어머니께서 온종일 전을 부치시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전들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마다, 저는 참지 못하고 어머니 몰래 하나씩 집어먹곤 했죠.
어머니께 걸려 "이놈의 손!"이라며 등짝을 맞으면서도, 그 자리에서 바로 부쳐 먹는 전의 맛은 꿀맛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혼나는 게 서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고소한 기름 냄새와 따뜻한 전 한 조각이 명절의 풍요로움을 상징했던 것
같습니다.

몇 년 만에 집에서 직접 만든 명절 음식을 보니, 추석다운 기분이 제대로 느껴져서 마음이 참 좋았습니다.
거창한 차례상은 아니지만, 우리 부부가 함께 정성껏 만든 모듬전이야말로 소박하지만 가장 의미 있는 명절 상차림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듬전 한 접시와 함께하는 조용한 연휴
점심 식사는 다섯 가지 모듬전을 조금씩 담아 밥 없이 깔끔하게 한 끼로 해결했습니다. 따뜻하고 바삭한 전을 맛보니,
이 소소한 행복이 곧 명절의 참맛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향 대신 택한 조용한 제주에서의 추석 연휴. 올 추석은 이렇게 아내가 정성껏 부친 맛있는 모듬전 한 접시와 함께 평화롭고
고요하게 흘러갈 것 같습니다. 북적이지 않아도, 왁자지껄하지 않아도 충분히 따뜻하고 행복한 추석입니다.
이웃님들의 추석은 어떤 모습인가요? 여러분도 명절 음식과 관련된 특별한 추억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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